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문단 편집) === 에로스와 문명 === [[지그문트 프로이트|프로이트]]는 1930년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이란 행복과 성적 쾌락을 승화시켜 노동과 사회적 제약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 가지 원칙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리의 본능은 원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쾌락원칙'이다. 하지만 사회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고통이 없는 필요의 충족이란 불가능하다는 트라우마적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고, 이에 따라 사회는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동을 하도록 개인에게 개입한다. 이러한 사회의 억압을 프로이트는 '현실원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현실원칙에 의해서 문명이 발전하는 것이라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이었다. 마르쿠제는 이 논의에서 더 나아가, 현실원칙의 억압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다. 마르쿠제는 인간 종이 살아남기 위해서 문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억압을 '기초억압'이라 하고, 탐욕스럽고 적대적으로 확장하는 필요 이상의 억압을 '과잉억압'이라고 구분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잉억압'은 합리성을 내세워 노동을 전문화시키는데, 노동의 전문화로 인해 인간은 단지 사회가 미리 설립해놓은 기능들만 수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는 쾌락원칙의 제약을 합리적인 법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조종당하며, 광고, 대중문화, 이데올로기는 노동자에게 이 법을 내면화시킨다. 이제 자본가를 위해 상품과 이윤을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이미 계획된 기능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우리의 또다른 본성이 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욕망하도록 정해진 것을 욕망한다. 그러나 이렇게 변질된 욕망은 본디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은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원 부족으로 인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으므로 '현실원칙의 억압'은 절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마르쿠제가 살았던 당시 미국은 더 이상 자원 부족으로 인한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생산성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프로이트와는 달리 마르쿠제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만 한다면 '억압 없는 문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결핍을 지적한 것이 초기에는 아마도 유효했겠지만, 이제 짐짓 결핍처럼 보이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일하게 만드는 기능을 할 뿐이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벗겨내고 보면 우리는 '과잉억압'에서 충분히 탈출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생각이었다. 물론 현실은 만만치 않다. 과거에 인간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우리의 노동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기술은 우리를 더 많이 일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내도록 동원되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시간 대부분을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보낸다.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도덕적이고 정신적 상해는 매우 심각해서 우리의 집단적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현대 사회 속 개인의 허무적 경향과 그로 인한 부작용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과잉억압은 분명 이데올로기적 장치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효과가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는 그것이 그런 효과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조차 주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과잉억압(과잉노동)이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과감하게 말해야 한다. 즉, 선진 산업화사회에서의 문제는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원의 공정하고 평등한 분배의 부재에 있다. 마르쿠제는 노동하는 날이 짧아지고 재화와 서비스의 개선된 분배, 혹은 노동의 더 나은 분화를 통해서 모든 사람의 욕구가 만족스럽게 충족됨으로써 그 결과 에로스적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힘든 노동의 폐지, 환경의 개량, 질병과 부패의 정복 등과 같이 과잉억압이 없는 문명은 생산과 노동에 있어서 충실한 만족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과잉억압이 없는 문명에서 노동은 단순한 도구가 되기보다 에로스(긍정적인 쾌락에너지)로 재구성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에서 에로스를 얻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몸이 하는 일, 곧 사회적 관계, 일, 문화 창조에 있어서도 노동이 놀이와 창조적 활동으로 여겨져 에로스화 된다. 마르쿠제는 단지 우리가 놀기만 하고 일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예측되는 결핍을 적절하게 충족시켜줄 정도로만 필요하고, 그래서 그런 노동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그 이외의 과잉노동이 불필요한 것이라는 게 마르쿠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해하기 쉽게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마르쿠제의 의도는 [[워라벨]]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억압이 없는 사회에서의 '적절한 노동'은, 자기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